깨고나니 밑도끝도 없이 우울하다.
스트레스에 민감해진 내 피부는 어제 오전오후에 하리랑 같이 있을 때만해도 매끈 깨끗했었는데
짐싸고 집에 올 때 다 되기 시작하니까 얼굴 아래에 뭐가 하나 둘 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주 완전히 멍게가 되어 있다. 끔찍해서 얼굴 만지기도 거울 보기도 싫다.
하리가 옆에 있을 때에는 방해가 되고 있다 폐 끼치고 있다 생각하면서도 아주 가끔 하리 까칠해져서 툭툭 치는 말 같은 거 하기 전까진 좀 아슬아슬 정신을 편히 놓고 지낼 수 있어서, 울산 집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했다.
남의 집에, 것도 친구 남동생도 같이 살고 있는 집에 낑겨들어 신세 진 건데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건 나도 돕고 싶어 내 빨래 세탁기 돌릴 때 수건 같은 것도 같이 빨고. 방바닥 청소도 할 수 있는만큼 열심히 하고. 이불도 깔고개고. 아주 드물게 하리가 뭔가 부탁하면 기쁘게 움직이고, 집에 돌아갈 때 하리 좋아하는 빵도 좀 사고(단, 취향은 정말 내 취향의 빵이지만; 하리가 좋아하는 빵은 내가 잘 못 먹는 빵종류가 많아서; 뭐가 맛있는 건줄 몰라서 고를 수가 없다;)...
폐란 폐는 부모님 및 가족께 다 끼치고, 안정은 친구들한테서 겨우겨우 얻어 살고 있고. 약 다 떨어져가서 목숨줄이 간당간당하니 날 걱정하신 누구씨께서 귀한 약도 주시고. ㅡ 근데 우리 거기 앉아서 그 약 주고받으며 이야기 하고 있었더니 무슨 약품 거래하는 거 마냥;; 그런 기분이지 않았어요?; 쵸큼 시츄에이숑이 재밌구나 하는 생각은 솔직히 들긴 했지만, 잡혀가도 할 말은 없는 일일지도 몰라;;; 나중에 처방전 좀 보여주세요. 약품정보를 좀 찾아봐서 정리해야겠어요.
그러고보니 핑크공주한테도 약 받아야 한다.
어휴 이런 구명줄들. 좋아합니다! 킥킥킥.
내가 화장실 가느라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손을 만지게 허락하고 내버려둬주신 여람님이랑 내 품에 쏙 파고 들어와 부비며 자리잡고 앉아 잠꼬대에 경기까지 일으키며 잘도 자던 그 요크셔테리어(맞지?)가 눈앞에서 가물가물. 적당히 따뜻하고 계속 만지고 싶은 보들보들한 피부, 따뜻하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기다란 털을 가진 생물이 내게 온전히 몸을 맡기고 자고 있는 것. 힘들어하시면서도 이래저래 챙겨주시며 같이 어울려주셨던 곰도리님. 움칠거릴 때마다 사과나 따끔한 말들과 함께 나를 다독여 주며 맛난 것들을 마음 편히 느긋하게 잔뜩 먹게 해준 하리. 어른스럽고 우아한 봄날개나리색에 넓은 하늘색이 더 넓게 펼쳐진 엘리트 아가씨(레이디)풍의 부드러운 르노님 +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
2, 3분 단위로 시간을 확인하며 체감과 실제의 커다란 갭에 놀라는 것도 너무 많이 겪어 지쳐 죽을 것 같은 10시 20분부터 4시 15분까지의 기차여행. 최고로 시간이 많이 지난 게 3분 20몇 초 였나.
하리 말대로 도핑 상태에서 위험을 겪으면 방어력이 바닥을 쳐서 오히려 더 위험해질 거 같아 약도 하나 못 먹고 신경줄 바작빠작 태워가며 웃는 얼굴로 초긴장 상태.
모드가 지나치게 뺑돌아 옆 자리 아주머니께도 뒷자리 아저씨께도 앞자리 아가씨들한테도 반쯤 미쳐서 친절친절. 심지어 앞자리 아가씨들이 의자를 너무 뒤로 내리는 바람에 내 트렁크가 좌석과 의자 등받이 사이에 끼어 눌려 빠그덕 소리를 내며 위험해졌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위도 친절의 말투밖에 안 나갔다.
매우매우 죄송하다는 듯이, 웃는 낯으로. 예의바르고 달콤한 목소리로.
"저어ㅡ 죄송합니다. 뒤에 트렁크가 있어서 의자 더 내리셔도 그 이상은 안 내려가거든요."
해석해 볼 사람?
"의작 작작 내리세요. 뒤에도 사람 있거든요? 내 트렁크 지금 댁의 의자가 깔아뭉개서 좀 손상됐어요. 빠각거리는 소리 나고 눌리는 소리 나면 사람이 적당히라는 것도 좀 알아야지, 이게 지금 새마을 특실 vip 끝자린 줄 아세요? 지금 댁의 그 의자 침대 아니거든요?"
- 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눈물 범벅이 될 거 같아 하리의 사랑의 선물, 떡봉지를 끌어안고.
기차 여행 내내 내겐 하리가 준 하리의 사랑의 결정, 떡과 고구마 봉지가 있다, 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내었다.
확실히 폰이 잘리니까 이런 때 완전히 고립되는군.
그래도 기차 안에서는 승무원이 있으니까, 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그 승무원들은 어디에 숨고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찾을 때마다 신통방통하게 사라지더란 말이지.
약 먹고 다시 자야겠다.
날이 맑으면 좋겠다.
빨래가 한가득이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본 건 서울 올라가기 전에 해놓고 널어놨던 한더미의 빨래 중에서도,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진 내 빨래들.
세탁망 통채로 침대에 던져져 있었단 건, 쟤들이 말려지지도 않은 채 저기 위에 올라가 있었단 걸까. 다 빨아놓고 말려놓은 바지 위의 이 새똥 같은 하얀 건 또 뭐지?
아, 모르겠다. 다시 빨지 뭐.
요란다가 뉴이어 이브에 고래 보는 배타러 가자고 초대해줬는데 폰 잘려서 답장도 못하고.
페이스북에 돈 다 떨어져서 아무데도 못 간다는 이야기도 해올려야 하는데.
애들이 일부러 챙겨서 이름까지 짚어가며 불러주는데 이런 때도 참 눈물난다.
사람들이 내게 친절한 것은 대체 뭣 때문일까.
친절의 무한루프 순기능 때문일까. 내가 처음에 친절했기 때문에?
그냥 그걸로 밀고 가면 되나?
나의 친절은 모두가 진심이지만 종종 사람들은 "난 친절할 뿐이지 상냥하거나 다정하지는 않아요."라는 말을 잊는 듯하다.
왜 자꾸 날 그쪽으로 끌어당기세요?
난 친절한 나로 만족하고 있어요. 상냥하거나 다정해지고 싶지 않아.
내가 거기까지 가게 되면 이번에야말로 진짜로 죽을 거 같거든.
내가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칼을 바깥방향으로 쥐게 하지 마세요. 칼날은 언제나 안쪽을 향해 있어야 한다.
나의 룰이 내 안에서 언페어 한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어.
모순과 언페어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잖아.
돈이 다 떨어져서, 정말 정말 가고 싶은 그 기쁜 초대에 응할 수 없어서 너무나 미안하다 - 는 이야기, 영작이야 할 수 있다. 그냥 직설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로인해 저 아이들이 인상 찌푸리게 하거나 "oh..." 라는 소릴 하게 하는 게 너무나 싫다.
그래도 해야 하니까,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자꾸 미룬다.
차라리 누가 대신해서 이야기 좀 해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직통으로 상황을 말할 수밖에 없는 전화라도 오던가.
문자나 메일, 쪽지는 답신의 상황을 내가 정할 수 있어서 이런 때 나를 비겁해지게 만들지.
게다가 난 폰도 잘렸잖아? 인터넷도 힘들고 많이 불편한 아버지 댁에 있잖아?
최악으로 당당한 변명의 시츄에이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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